2014-08-02, 글 쓰기 시작함
세상 모든 이가 자기 어머니를 추억하지 않는 이가 없을 것입니다. 그 추억은 때론 쓰라리고 가슴 아픈 것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아련한 그리움으로 얼룩져 있을 것입니다.
제가 아주 어렸을 때, 어머니께서 아버지의 구박을 받아, 집을 나서면서 저를 데리고 나갔던 것이며, 둘이 함께 영화관에서 시간을 보냈던 것이며, 재래시장 길가에서 군것질 하던 것이며, 가계에 보탬이 되기 위해 닭과 오리를 기르면서 아이들 학비를 벌던 일이며, 또 이런 저런 일들에 위로해주었던 것들이며, 그리고 늘상 자랑하기를, “이 집에 시집와서 아들 넷에 딸 하나 낳았는데, 아들 셋이 모두 서울대학교 나왔고, 다른 하나는 고시에 패스했어요.”하고 남들에게 그 큰 목소리로 꿀림 없이 당당했고…… “내 목소리가 큰 게, 다 귀 어두운 시어머니 때문이요.”라고 한층 더 목청을 돋우어 말씀하시고, 그래서 우리들은 제발 목소리 좀 낮추라고 핀잔을 주기도 했지만, 무엇이든 남 주기 좋아하던 소위 ‘손이 큰 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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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6월에 어머니를 요양병원으로 보내 드리고, 남아 있는 어머니의 소품을, 특히 사진을 정리하면서 어머니에 대한 기록을 정리해 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 그 사진들을 스캐닝하고 시간을 내어 기록하고 있는 중입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젖먹이로서 어머니의 품을 떠나, 성장하면서 부모의 슬하를 떠나, 고향을 뒤로 하고, 서울이라는 낯선 땅에서 공부하고, 취업하고, 경쟁하며, 살아오기 수십 년, 부모님의 무게는 제 속에서 점점 가벼워지고, 그 존재감은 사라져왔던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이건 어디 저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공통적이기도 합니다.
어머니를 다시 만나서 함께 살게 된 것은, 글을 쓰는 지금부터 10년 전으로, 2004년 추석을 지내고 나서 입니다. 어머니의 아들 넷과 딸 하나는 모두 부산을 떠나 외지에서 둥지를 털었고, 아버님께서 돌아가신 해가 1983년이니까, 어머니는 22년간 이웃 따라 거처를 옮기면서, 혼자서 생활해 왔습니다. 셋째 아들이 공직생활을 부산에서 할 때는, 셋째 내외가, 따로 사시는 어머님을 가끔 찾아가서 뵈었겠지만, 어머니는 대부분의 시간을 고향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며 그곳에서 혼자 독립적으로 살아왔습니다.
어머니 나이 여든이 넘어가면서, 형제들 사이에 어머니 모시는 문제로 다툼이 일기 시작하고, 어머니 역시 "이제는 너희들한테 갈란다”라는 말씀이 잦아지면서, 첫째, 둘째, 셋째가 있는 서울 땅으로 오시게 된 것입니다. 원래는 두째, 셋째가 이웃해 있는 서울 신길동 쪽에, 어머니 용으로 별도로 작은 아파트 방 하나를 구하기로 했으나, 여의치 않자, 직장 때문에 일산에서 혼자 기거하고 있는 첫째가 모시겠다고 해서 일산으로 오시게 됩니다.
어머니를 요양병원으로 보내드리고 어머니의 사물을 정리하는 가운데, 손수건으로 정성스럽게 싸둔 것이 있어 풀어 보니, 그간 간직하고 계시던 빛 바랜 사진들이었습니다. 이제 사진을 하나씩 보고서 가급적 연대순으로 정리해 둡니다. 그에 앞써 제가 태어난 부산의 좌천동과 아버님이 돌아가신 곳 그리고 어머니가 계셨던 곳을 지도를 통해 추억해보려 합니다.
[고향 부산의 좌천동, 수정동 그리고 대연동]
부산시 동구 좌천동 947번지는 저와 제 동생이 태어난 곳입니다. 유년 시절 그곳에서 동쪽으로 보면 철길 연변에 큰 콘크리트 방벽이 여러개 서 있었는데, 나중에 그 곳을 연결해서 좌성로라는 길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제 고향집은 고가 도로 밑에 파묻혀 버렸습니다. 제가 다녔던 일신유치원과 성남초등학교가 보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일제 강점기에 목수 일을 배우셨는데, 해방후 건축업을 하면서 저희는 집을 몇 채씩 가지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나는요, 애를 놓을 때마다 집이 한 채씩 생겼어요. 저거 먹을 것 다 가지고 나왔어요." 하고 자랑을 하곤 했습니다. 제 태어난 동네에서, 제 어릴 적에 水道가 설치 되어있고 전화가 있었던 집은 흔하지 않았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저희 집에 와서 수돗물을 양동이에 받아가고, 또는 전화를 얻어 쓰려고 오곤 했습니다. 제 고향집이 도로계획에 편입되어 헐리게 되자, 저희는 도로 위쪽 마을로 아버님께서 새로 지은 집으로 이사를 합니다. 저는 2,3번째 좌천동 집에서 중학교를 다니게 됩니다. 아래 지도의 좌하단에 있는 부산중학교인데, 제 바로 밑에 동생도 다니게 됩니다. 그런데, 저는 중3시절에 학교폭력에 휩쓸리는 사건을 겪게 됩니다. 요즘 심심찮게 올라오는 유사한 사건을 보면서, 맹목적인 어린 청춘의 과시욕과 소영웅심들이 걱정됩니다. 고입시험에 전념하던 겨울철 어느날, 당시 학생깡패 그룹에 속했던 동급생 2명과의 대결에서 죽사발이 되도록 얻어맞고는 집에 돌아왔습니다. 어머니가 올라와서 저의 푸르딩딩하게 변한 얼굴을 보고 놀란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다음날 아버님께서 학교를 찾아가 항의하고 오셨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저는 그들이 보기 싫어 부산고등학교를 지원하지 않고 당시 새롭게 생긴 대연동에 소재한 부산공업고등전문학교 화공과를 지원하게 됩니다. 이 학교는 5년제로 뒤에 부산수산대학교와 합병하여 부산개방대학교가 됩니다.
위 수정동집은 집터가 2단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위 60평 정도에 본 채가 있고, 아래 50평 정도에 판매를 목적으로 새롭게 짓는 집이 있었습니다. 잠시 공사가 중단되어 있었는데 어머니는 이곳에서 산란용 닭을 길렀습니다. 이것이 어머니가 처음으로 사업전선에 뛰어든 것입니다. 어린 동생들은 어머니 일을 돕기 위해 자신의 노력동원을 해야 만 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집에서 대학 입시 준비를 하였고 그리고 저는 마침내 서울로 가게 됩니다.
제가 서울로 올라간 후, 몇 해가 지나 아버님을 수정동 집을 팔고 대연동으로 옮기셨습니다. 그동안 가세는 기울어들었습니다. 아버님이 건축업에서 손을 떼고 벌린 다른 사업이 모두 실패가 되면서 식구 모두가 가계를 유지하는데 총동원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그중 가장 큰 실패는 부산 반송동에서 한 오리농장이었습니다. 여름방학에는 제가 내려가 거들기도 했는데 자가배합사료를 만들기 위해 삽질을 하다보면 손가락이 경직되어 방아쇠 손가락이 되곤 했습니다. 사업을 모두 청산하고 난 후, 이럭 저럭 시간이 흐른 후, 어머니는 뇌출혈로 입원을 하게 되고, 아버님은 병 간호 후유증으로 당뇨가 합병증으로 번져 결국 운명하게 됩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가산을 정리한 후, 좌천동 집이 헐릴 때, 동네 사람들이 옮겨서 모여 살던 곳, 용호동으로 혼자서 옮겨 갔습니다.
2004년 추석을 지내고, 둘째와 함께, 저는 회사에서 트럭을 빌려, 위 지도의 어머니가 계신 곳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수십년 묵은 장롱과 이불, 어머니 옷, 그리고 쾌쾌묵은 살림살이를 싣고 고양시 일산동으로 올라왔습니다. 빠지지 않고 따라온 것은 어머니께서 스스로 마련하신 당신이 돌아가실 때 입을 수의입니다.
[어머니의 손수건 보따리 속 사진들]
[아버지 살아 계실 때의 흔적들]
위 사진은 어머니가 비교적 젊었을 때의 사진입니다. 진해 벚꽃놀이 가서 찍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몇 안 되는 어머니께서 갖고 계신 사진을 모두 살펴보면, 젊은 시절, 어머니와 아버지 두 분이 함께 찍은 사진은 없습니다. 아버님 살아 생전의 사진으로는 가진 게 없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돌아 가시고 난 후, 고향 동네 계원들과 찍었거나 자식들과 찍은 사진들입니다. 아버님의 모습이 보이는 사진으로는 제가 가지고 있는 사진이 몇 점 있을 뿐입니다. 1979년 10월 형제들과 함께, 충무시(지금의 통영시)에 여행을 갈 때 찍은 사진들입니다. 아버지는 일제 치하에서 어린 시절을 통영(이후 충무시 그리고 다시 통영시로 지명이 바뀌게 됨)에 보내었고 그곳에 할아버지를 묻었다고 합니다.
위 3장의 사진이 가족이 함께 나들이 갔던 유일한 사진입니다.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의 아버지의 명함입니다. 당시에는 전화가 무척 귀해서 동네 사람들이 저의 집에 와서 전화를 사용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1982년 어머니는 뇌출혈로 쓸어지고 장기간 입원을 하시게 됩니다. 아버지는 그 당시 당뇨를 앓고 있었는데, 어머니 병 간호에 섭식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에, 목 주위에 종양이 발생하여 결국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나시게 됩니다.
[아버님을 떠나 보내심]
아버님의 막내인 다섯째가 위와 같이 애절한 추도문을 지었습니다.이렇게 아버님을 떠나 보내시고 난 후, 어머니는 부산의 한 절에서 한동안 공양하며 세월을 보냅니다. 저희들에게 가끔 말씀하시기를 “너거 아부지가 날 살려놓고 저 세상으로 갔다.”라고 하시죠.
가족들에게 별로 애정 표현이 없어셨던 아버님으로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정성을 당시 어머니에게 기울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건강을 회복하면서 동네 주민들과 어울리고, 셋째, 넷째, 다섯째를 근처에 두고 부산에서 함께 사시게 되는데, 어머님의 손수건 보따리에 있는 사진들은 대부분 그 당시의 사진들입니다. 이제 그 보따리 속의 사진을 하나씩 들여다 봅니다.
[어머니의 신앙생활]
[이웃들과의 생활] 어머니는 한 동네에서 사시든 분, 그리고 아버님의 건축업을 도와주신 목수와 토수들과 친하게 지냈습니다
[직계 가족들과 함께]
[친척들과 함께]
가족과 친지들 사진 중에서 첫째와 둘째네 가족들과 함께 찍은 사진은 별로 많질 않았습니다. 첫째와 둘째는 서울을 근거지로 살다 보니, 어머니랑 함께 나들이 나가 사진 찍을 기회가 별로 없었던 거죠. 그러다가 제가 울산공장으로 발령이 나서 내려가 있던 기간 중에, 부산에서 어머니와 두 고모 분을 모시고 충무시에 놀러 가서 찍었던 사진이 발견되었습니다.
[시누이와 함께 찍은 사진들]
제가 생전에 본 고모님은 3분이십니가. 그 중에 한 분은 제가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때 돌아가시고 나머지 2분이 계셨습니다. 그 중의 한 분(아래 사진에서 맨 왼쪽)은 올 4월에 운명하셨습니다.
[어머니 8순 잔치]
그리고 어머니 8순 잔치를 부산에서 할 때의 사진들이 있었습니다.
[가장 최근의 사진들]
가장 최근의 사진으로는, 어머니를 제가 일산으로 모시고 와서 함께 있던 기간 중, 2007년에 둘째와 함께 어머니를 모시고, 여수 5촌 당숙 네 갈 때의 사진들을 보관하고 계셨습니다.
이때는 둘째와 상의해서, 어머니가 더 연로해지기 전에, 멀리 갈 수 있는데 까지는 가보자고 해서, 승용차로 지리산을 돌아 여수까지 갔던 것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손수건 보따리에 싸인 사진은 여기까지가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어머니의 모습은 제 컴퓨터에 사진파일로 보관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사진을 들여다 보면 어머니의 모습은 예전과 달리 쇠잔해지고 총명함도 옅어져 가는 듯 합니다.
[2009년도의 흔적들]
어머니는 저와 함께 사시면서, 제가 직장에 나가면 손수 밥도 짓고 반찬도 하셨습니다. 여름철 복날이면 삼계탕이나 닭죽을 하겠다는 메뉴 계획이 있었습니다. 동생들이오면 가끔 외식을 나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점점 쇠잔해지면서, 제가 간편한 요리를 하게 되고 어머니는 설거지 위주로 하게 됩니다. 그리고 저는 어머니의 식사량이 점점 줄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드시는 음식의 양이 줄고, 먹다가 만 음식은 냉장고에 보관하기가 일숩니다. 틀니를 뺀 어머니의 뽈이 홀쪽합니다. 어머니의 밥맛이 없다 싶으면 제가 국수를 삶기도 했는데 몇 젓가락 드시다가 냉장고에 넣어버립니다,
그러다 보니 냉장고 속이 넘쳐 흐릅니다. 국을 끓일 때만 해도 냄비 하나 가득 끓여 놓고 일주일이 넘어 가도록 있으니, 저는 어머니 몰래 밤에 내다 버리곤 했죠. 셋째가 가끔 횟감을 사 들고 오기도 하고 외식을 하기도 했으며. 넷째(딸)가 요구르트를 자주 가져다 주어 냉장고는 요구르트와 우유로 채워지기도 했습니다. 어머니의 병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 혈압이 높다고 해서 병원에서 “이 약은 평생 먹어야 한다더라” 하시면서 약 드시는 것은 빠뜨리지 않습니다.
건강했을 때는 당신 스스로 병원을 찾아 갔고, 기력이 모자라다 싶으면 링거 주사도 맞고 오시곤 했습니다. 제 직장에서 숙소까지는 10분도 되지 않는 거리여서, 업무를 보다가도 혼자 계실 어머님이 궁금해서 집에 가보곤 했는데, 어느 날 집에 계시지 않아 이곳 저곳 갈만한 곳을 찾아보았죠. 30여분을 찾아 돌아다녀도 보이질 않기에 길을 잃어버린 게 아닌가 하고 크게 당황해서 파출소를 찾아가려는데, 멀리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어떻게 병원을 찾아가셨는지, 1시간 가량 링거를 맞고 나오면서 병원 사거리에서 붕어빵을 사들고 오시는 것이었습니다. 아들 먹으라고…..
회사 근처에 생수터가 있어 운동 삼아 그곳에 물을 떠오시곤 했는데, 욕심은 있으셔서 어는 한 손을 비게 해서 오지 않습니다. 어느 날 집에 오니 또 계시지 않아 찾아 나서는데 멀리서 양손에 생수를 떠서 오시는 게 보였습니다. 마침 카메라가 있어, 숨어서 몇 컷을 찍었습니다.
숨어서 얼마나 견디는가 하고 지켜 보고 있는데, 힘들게 들고 오시다가 결국 주저 앉았습니다. 그제서야 제가 나갔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어머니는 그런대로 몸을 지탱했고 정신도 말짱했습니다.
휴일이 되면 마트에 어머니를 모시고 함께 장을 보러 갔습니다. 어머니에게 운동을 시킬 겸 억지로라도 걷게 만들 목적이었습니다
집에 계실 때는 어머니의 유일한 낙이 TV보시는 것으로, 이 채널 저 채널을 돌리면서 사극이 나오면서 열심히 보십니다. 그리고 혼자서 말을 주고 받습니다. 경로당에 나가시라고 해도 마다 하시고 그냥 혼자서 TV를 보시는 것으로 소일을 하십니다. “내 친구가 TV 아니가,”라고 말씀하시면서......
또 하나의 도락은 커피를 즐겨 드시는 것입니다.
커피는 아버님 돌아가신 후에 절에서 생활하실 때 습관이 들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절 이야기를 하니까 어머니의 한 말씀이 생각이 나서 여기에 기록해 둡니다. 어머니의 법명은 ‘장선자월’입니다.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겠으되 절에서 스님이 사주까지 보고 지어 준 이름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어느 날 어머니가 절방에서, 밤 늦게 잠이 들었는데, 한 밤중에 잠이 깨어, 왠지 이상해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함께 기거하고 있던 다른 동료 보살이 옆에 없는 것을 알고서는, “아야, 오늘은 내 혼자구나.”하고 중얼거렸답니다. 그 보살 님은 마침 그날 집에 일이 있어 낮에 나가고 안 계셨던 것인데, 평소 옆에 같이 있다가 없으니까 그날 따라 옆자리가 허전했던 것이죠. 그랬더니 어디에선가 “아니다, 선자월아. 내가 함께 있잖는냐.”라는 소리가 들렸답니다. 그래서 "이상하다. 옆에 아무도 없는데 어디서 그 소리가 났는고?" 하고 주위를 둘러보니 관음보살 액자가 보이더랍니다.
어머니는 그렇게 불심이 깊었습니다. 그런데 정신이 점점 쇠약해져갑니다
어머니가 자다가 깨어나면 열심히 기도를 드립니다. 자식들 잘 되게 해달라는 염원이죠. 아니, 하나 더 있습니다. 자다가 편안하게 그냥 눈 감은채 저 세상으로 가게 해달라고.......
어머니의 신체의 위생관리 측면에서는, 동네 목욕탕에 가서 목욕을 하고 오시곤 했는데, 언제부터인가 몸이 자꾸 근지럽다고 하면서 긁어대기에 옷을 벗겨 보았습니다. 두드러기가 올라오고 손톱에 긁힌 자국이 보입니다. 앞가슴이고 등이고 옆구리고 모두 상처가 나있습니다.
그래서 약을 사서 바르고, 제가 아로마 오일로 맛사지를 해드리기도 했지만, 목욕탕을 가도 힘에 부쳐 제대로 각질을 벗겨내지 못해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어머니가 1925년생이고 이때가 2009년이니 어머니 나이는 84세인 해입니다. 어머니가 점점 이상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집에는, 무료할 때 어머니랑 제가 한잔씩 하려고 과실주를 담아두었는데, 술이 바닥이 나는 속도가 빨라져 갔습니다. 퇴근해서 돌아보면, 동네 가게에 가서 술을 사가지고 와서 취해서 떨어져 주무시곤 했습니다.
이러한 횟수가 늘어나면서 어머니는 말씀이 거칠어지고 행동이 난폭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아~, 사람이 이렇게도 변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둘째 사무실이 있는 공덕동의 한 노인전문병원에 보름간 입원을 하기도 합니다. 병명은 노인성치매였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2009년 말, 남 밑에서 일하는 게 적성에 맞지 않는 저로서는, 마지막 안간힘으로 독자적인 홀로서기를 시도해봅니다. 48년생인 저의 나이는 만 61세가 넘어가는 해입니다. 하여간 저는 개인 창업에 도전으로, 화성시 팔탄면으로 작은 사무실 겸 연구소를 얻어서 내려 오게 됩니다. 이 때 제가 계속적으로 어머니를 돌볼 수가 없어, 넷째인 여동생 집, 서울의 신림동으로 어머니를 보내게 됩니다. 그리고 이 해말, 저는 독립된 사무실 겸 연구실에서 혼자서 투쟁하는 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제 사무실 겸 연구소가 있는 공장 단지입니다. 2층인데 눈이 쏟아지면 주위는 눈으로 파묻혀 고립무원의 상태가 됩니다. 2009/10년의 겨울은 제게 혹독했습니다. 한번은 어머니를 모시고 이곳에 왔는데, 하시는 말씀이 "퇴직금 받아서 여기를 샀나?" 하시는 것입니다. 이게 어머니의 욕심일까요. 어머니 평생에, 정확히 말하면 아버님 살아계시는 동안에는, 단 한번도 남의 집에 살아본 적이 없읍니다. 아버님이 손수 지으신 자신의 집에서 살았습니다.
[2010년 한 해의 변화]
해가 바뀌어, 전년에 이어, 새로운 상품을 기획해서, 실험해서, 시제품을 만들어, 인터넷 오픈마켓에 올리면서, 고군분투해야 하는 과정이 계속됩니다. 천연 염색제인 헤나를 인도에서 수입해서 시장 테스트를 하고, 미국으로 수출하기 위해 소싱된 각종 제품들을 한국 내 오픈 마켓에 런칭하는 작업을 하면서 일주일을 보내는데, 주말이면 어김없이 신림동으로 올라가 어머니와 함께 시간을 보냈습니다. 저녁에 둘이서 마주 앉아 2인 고스톱을 하고 여동생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그리고 어머니의 휴식을 위해 근처 사우나로 가서 반나절을 보냅니다.
어머니가 앉아 계신 곳이 여동생네 집이고, 밖으로 나오셔서 사우나 가려고 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찜질방에서 더운 것은 잘 참으십니다. 옛날 재래식 숯가마 가시던 기억이 나는 듯 합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면,
둘이서 마주 앉아 2인 고스톱을 칩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저녁 식사를 합니다.
고기를 구어 먹을 때도 있고, 때로는 특별식으로 여동생이 준비를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여동생이 출근하면, 어머니 아침이나, 점심으로 벌도로 상차림을 준비해 둡니다.
어머니는 혼자 계시면 그냥 간단하게 끼니를 떼우기 때문에 주로 컵라면을 드시는데 이게 장기간 계속되니 몸에 좋지 않게 됩니다
엄마의 넷째인 제 여동생에게는 딸이 둘 있습니다. 위 사진의 학생은, 제 여동생의 둘째 딸(최서현)입니다. 제 어머니는 외손녀를 볼 때, 자기 딸이 안쓰러워 보입니다. 딸의 딸들이 공부 잘하고, 잘 되어서, 자기 엄마에게 잘 해주어 자기 딸이 고생을 덜 했으면 하는 엄마의 심정인 거죠. 여동생의 딸이 훌륭하게 성장하기를 저는 바라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음식을 먹다 남기면, 남기는 족족 냉장고에 넣거나 아니면 한쪽 구석에 놓아두는 습관 때문에, 여동생과는 물론 여동생의 딸들과도 어머니 사이에 작은 실갱이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래도 '장정자' 여사를 이길 수 없습니다.
이 해에만 해도 어머니는 자신의 발로 돌아다닐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님의 술 버릇이 고약해지기 시작합니다. 한밤중에도 술을 찾아 주방 구석구석을 뒤지고 이 때문에 여동생의 신경도 날카로워집니다. 저는 팔탄에 있으면서, 밤 12시가 넘어 핸드폰이 울리면, 화들짝 놀라면서 탄식을 합니다. 이 시간에 전화를 할 사람은 제 여동생뿐입니다. 어머니의 술 주정에 짜증이 난 동생이 달리 하소연 할 때는 저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머니 때문에 속 상하고 가슴 아파하다가, 결국은 제가 이 해 5월에 신림동으로 거처를 옮깁니다. 여동생 집에서, 집 2채 건너, 신림동 고시방이 하나 빈 게 생겨 그곳으로 옮기고, 어머니를 함께 돌보게 됩니다. 자식 둘이 옆에 있으니 어머니는 기분이 좋으신 모양입니다. 저녁 식사 때가 되면 어머니는 저를 부르러 옵니다. "문아~, 밥 먹자."그렇게 평화로운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팔탄면의 한 업체에 우연히 다시 취업을 하게 되어, 창업을 포기하고 입사를 하게 되면서, 다시 팔탄면으로 거처를 옮깁니다. 서울 신림동에서 화성시 팔탄면까지 매일 출퇴근한다는 것은 시간적으로나 체력적으로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2011년의 어려움들]
제가 팔탄면으로 떠나고 나서 여동생은 아무래도 더 힘들어지기 마련이었고, 어머니는 자기 딸이 만만한지라 거침없이 감정을 발산하다 보면 둘 사이에 말다툼이 잦아지기도 합니다. 저로서는 달리 해결할 묘안이 없었기에 그저 토요일 저녁에 신림동에 와서 어머니랑 함께 놀아주는 정도였는데, 어머니의 몸 이곳 저곳의 고장 난 정도가 점점 심해지기 시작합니다.
귀가 들리지 않는다고 해서 동네 병원에 갔더니, 큰 병원으로 가라고 합니다. 해서 신림동 보라매 병원을 갔더니 귓속에 귀지가 많이 차서 꺼집어 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귀 구멍이 작아서 꺼내는데 애를 먹었습니다. 약을 넣어 부풀려 가면서 조금씩 꺼집어 내는데 한달 정도 걸렸습니다. 둘째와 제가 번갈아 가면서 일주일 단위로 병원을 오갔습니다.
게다가 잠이 오지 않으면 밤에 일어나 술을 찾습니다. 여동생이 술병을 숨겨놓았지만 어머니는 용케 찾아냅니다. 그러니 여동생하고 한 밤중에 다툼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여동생은 제게 전화를 합니다. 전화기에는, 여동생이 제게 하는 울음 섞인 신세 타령에 덧붙여, 어머니의 쇳소리가 함께 들려옵니다. …………저는 완전히 통곡하고 싶은 심정이 됩니다………
토요일이면, 가급적 제가 내려와 어머니 옆에 누워서 함께 잡니다. 억지로 잠을 재웁니다. 어머니는 깜박 잠이 들었다가 한 시간도 못되어 깨어나기 일쑵니다. 저는 어쩔 수없이, 수면제를 저도 먹고 어머니께 먹여 함께 잠들어보려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저까지 잠을 설치면 다음날은 정신이 멍해지고…… '이 일을 장차 어찌 할꼬' 하는 고민과 걱정으로 가슴이 답답한 하루하루를 보내게 됩니다.
하루는 밤 12시가 넘게 다투는 바람에 어머니를 여동생네 집에서 빼내 와야 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 밤에 수십 키로를 왕복해서 팔탄면 율암리에 있는 제 숙소로 모시고 와야만 했습니다. 어머니의 성깔과 고집도 여간 아닙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노인병이 찾아왔습니다. 한 해의 달력도 이제 몇 장 남지 않았는데, 혼자서 그럭저럭 걸어 다니시던 어머니가 어느 순간 다리가 아프다 하면서 주저앉는 것입니다. 몇 군데 병원을 다녀보니 ‘퇴행성관절염’이라는 것입니다. 이게 쉽게 낫지 않는 병이라는데 ‘어떻게 하지’ 하고 고민하는 가운데 여동생이 누구에게서 이야기를 들었는데 ‘뼈 주사’라는 것이 있다고 하면서, 어는 병원을 찾아가 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인터넷으로 검색하여 아래 병원을 찾아갔습니다.
관절정보의 내용을 자세히 읽어 보았습니다……. 일부만 아래에 인용해 놓습니다.
“…. 중년 또는 노년층에서 많이 발병하는 관절이 아픈 질환으로 나이든 노인에서 2명중 1명이 발생됩니다.(전 인구의 50%). 체중이 실리는 관절 중 무릎과 어깨, 허리 관절에 주로 발생하며, 팔꿈치, 손가락마다. 엉덩이 뼈, 발목 및 발가락 관절에서도 발병합니다……”
“퇴행성관절증의 치료방법: 1)물리치료법: 냉온 찜질, 중상개선을 위한 물리치료 보조기구 2) 약물치료법: 경구용 및 외용 소염제, 호르몬주사(흔히 말하는 뼈주사), 관절 연골 보호제(하이알주사) 3) 기타: 수영, 체중조절, 보온요법 등”
“하이알주사(관절연골보호제)의 특징: 가. 관절연골을 부드럽게 둘러 쌓아 윤활기능을 좋게 합니다. 나. 관절의 인대(Tendon)를 부드럽게 해 줌으로써 관절의 운동을 정상화 시킵니다….. 바. 부작용이 적고 안전한 약입니다. 사. 1단계 치료는 5주간에 걸쳐 매주 1관씩 5회 투약하면 됩니다."
근처 약국에서 약을 지었는데 약사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습니다. 병원에서 수술을 한다고 해도 제대로 낫지 않는 병이라고 합니다. 예전에는 이 '권 아무개 의원'에 문전성시를 이룰 만큼 많은 환자들이 왔다고 합니다. 어머니께 주사한 처방이 종래의 뼈-주사인지, 위 안내문의 하이알 주사인지 확실하게 구분은 하지 못하고, 고민하는사이에 한 해가 저물었습니다.
[2012년, 어쩔 수없이 요양병원 입원을 선택합니다]
위 의원을 3달을 다녔는데, 한달 있다가 오라고 합니다. 그래서 한 달을 넘기고 갔더니, 아프냐고 묻기에 제대로 걷지는 못해도 크게 아프다고 하지는 않는다고 하니까, 더 이상은 주사를 할 수 없다고 합니다. 권 의원에 마지막 온 날이 2013년 03월 06일입니다. 다른 약을 처방 받고, 어머니가 꼭 챙겨 드시는 눈 영양제 토비콤을 제정약국에서 구입합니다. 더 이상 이 동네 올 일이 없을 것입니다......
주사처방을 장기간 할 수 없는 무슨 이유가 있는 듯 합니다. 이것 저것 따지고 묻고 싶지도 않고, 그렇게 상냥하고 알뜰하게 이야기 해주는 것도 아니었어, 제 나름대로 무슨 결단을 내려야만 했습니다. 셋째가 여동생네에 오면서 휠체어를 사가지고 와서 동네 나들이를 시키곤 했습니다.
저는 전부터 요양원을 검색해 왔었지만, 남들 보기에 요양원 보낸다는 것이 부모를 버리는 것 아니냐는 선입견이 아직도 있고 해서 결정을 못하고 있었는데, 여동생이 힘들어해서 이제는 더 이상 집에서는 모시지 못할 것 같아, 어머니를 격리시키기로 결심을 하였습니다. 요양원은, 둘째와 함께 경기도의 몇 군데를 찾아가 보았는데, 규모가 협소하고 시설이 제 마음에 들지 않아 망설여왔습니다. 그러다가 어머니의 관절염으로 인해 본격적으로 요양병원을 알아보게 됩니다.
제가 있는 팔탄면 쪽으로 어머니를 모셔야 할 것 같아 근처의 요양병원을 검색하니 두 개의 요양병원이 떠올라 왔습니다. 상록요양병원은 도로변에서 꽤 떨어져 있어, 여동생이 대중교통으로 오기에는 불편했고, 미소요양병원은 버스에서 내려 5분 정도면 걸어서 갈 수 있었습니다. ‘상록’은 앞마당이 넓어 휠체어를 밀고 산책하기에는 좋겠다 싶었지만, ‘미소’가 신축건물이라고 시설이 깨끗하고 직원들의 첫인상이 좋아 그쪽으로 택했습니다. 날짜를 잡아놓고 둘째와 넷째와 함께 신림동 근처에서 어머니랑 점심을 함께 합니다.
어머니의 얼굴 모습이 예전과 달리 주름도 많이 잡히고, 웃는 모습도 다소 거칠어 보입니다.
드디어 어머니를 ‘후송’시키는 ‘D-데이’입니다. 저와 함께 갈 사람은 당연히 둘째가 따라 나섰고, 그리고 넷째의 큰딸(최정현)은 집을 떠나는 외할머니가 못내 아쉽습니다. 할머니가 병원 입원하시는 날은 함께 모시고 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용석’이도 함께 같이 가도 되겠냐고 묻습니다. 용석이는 셋째의 하나뿐인 아들입니다. 둘은 할머니 영역에서 같이 자랐기 때문에 서로가 친합니다.
의치가 빠진 어머니의 홀쪽 들어간 빰이며, 잠겨버린 어머니의 양쪽 눈, 그리고 파마 머리를 짤라 버리고 짧고 헝클어진 머리가 제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머리를 기르고 염색을 해서 젊게 해드리고 싶지만,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서로가 안정을 찾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드디어 병원복으로 갈아 입히고 배정된 침대에 앉게 했습니다. 손주들이 있어, 웃음을 잃지는 않지만......
다리 아픈 병이 다 나으면 퇴원할 수 있다고 어머니를 위로시키긴 했지만, 혼자 남아 계시지 않으려 합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서로가 이 어려움을 이겨내야 합니다............한 달이 가고 두 달이 갑니다............ 저는 그 사이 일주일 마다 병원으로 옵니다. 오다가다 가끔 남양성모성지를 들러곤 하죠. 묵상을 하기도 하고 촛불기원기도도 하곤 합니다.
첫째 며느리가 가끔 와서 어머니의 말 동무가 되어 줍니다. 저는 매주 토요일 아니면 일요일에, 어머니를 뵈러 병원에 가면서, 2주 걸러 한번씩 여동생과 함께 제가 근무하는 워터파크의 온천에 모시고 와서 온천욕을 시켜 드렸습니다. 그렇게 해서 어머니가 혼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느낌을 갖지 않도록 노력합니다.
그러나 목욕을 끝내고 병원으로 돌아가는 때에는 어김없이 병원으로 가지 않겠다고 합니다. 여동생네 집으로 가자고 합니다. 애들 먹을 것 좀 사가지고. 저는 더 이상 대꾸도 없이 묵묵히 병원으로 되돌아 갑니다. 이렇게 한 해가 끝나갈 무렵 어머니는 어느 정도가 적응이 되셨는지 ‘내 집에 가는 거가?’하고 묻습니다. 어머니는 어는새 병원을 ‘병원’이라고 하지 않고 ‘내 집’이라고 말씀을 하시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습니다. 어머니는 요양병원의 다른 할머니와 할아버지들과 함께 지내면서 마음을 붙인 듯했습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게다가 저를 더욱 ‘해피’하게 한 것은 어머니의 관절염이 더 이상 악화되지 않고 조금씩 개선이 되어 간 것입니다. 어머니는 휠체어 없이, 보행보조기 없이도 지팡이에만 의존해서 조금씩 걷게 되었습니다. 물론 병원에서 걷는 연습을 꾸준히 시킨 탓도 있을 것입니다.
헬스 관련 책을 읽어보니 나이가 들수록 더욱 운동을 해야 한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운동을 하지 않으면, 근력이 감퇴되는 것은 물론, 조골세포의 활동이 감소되어 뼈가 계속 약해져, 넘어지거나 침대에서 떨어질 경우, 치명적인 골절을 당할 수 있다고 되어 있더군요.
[2013년, 어머니에게 조금씩 찾아오는 웃음, 그리고 노인성 질병의 추가]
어머니의 외출:2013년 1월에는 장거리 외출을 했습니다. 무리라는 것을 알지만, 이때가 아니면 어머니의 혈족들을 볼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서 화성시 팔탄면에서 서울의 강남터미널의 예식장까지 어머니를 모시고 갔습니다. 저에게는 이종사촌의 결혼식이 있어 이모님들이 다 모였기 때문입니다. 실은 제 어머니는 무남독녀이지만.
어머니의 식사: 어머니는 병원 식사에 아주 잘 적응했습니다. 맛있다고 하시면서, 다 먹었다고 자랑을 하시곤 합니다.
어머니의 간식:
제 여동생이 올 때마다 매번 빠지지 않고 가져오는 우유와 야쿠르트 음료 그리고 제가 사오는 카스텔라와 부드러운 빵들, 그리고 다른 동생들이 사다 드리는 과일 등입니다. 그런데 제 어머니는 우리들이 사다 주는 것을 혼자서 드시는 것이 아니라, 받으면 받는 족족 병원에 있는 식구들 모두에게 다 나누어 줘버립니다. 그리고 포장지는 바로 쓰레기통으로 들어가버립니다.
어머니를 찾아오는 가족들: 제가 평균 1.5주에 한 번씩, 여동생이 평균 2주에 한번씩, 어쩌다가 딸을 대동하고, 그리고 첫째의 부인이 어쩌다가, 둘째가 어쩌다가, 셋째와 막내의 가족들이 일년에 2번~3번 정도 찾아옵니다. 그리고 참, 군자 이모가 한번 왔었군요.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뵙겠다면서!
어머니의 이웃: 어머니의 이웃을 같은 환자 할머니와 할아버지, 그리고 병원의 간호사와 도우미 아주머니들입니다.
침대에 누워계신 할머니들을 보면 서글퍼 옵니다. 마치 사형집행을 기약없이 기다리는 감옥의 죄수같이 느껴질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노년의 삶, 그 삶의 질이 어떻게 하면 개선이 될까 생각해 봅니다. 경제적으로 부족함이 없어야겠지만, 무엇보다도 건강해야 합니다. 건강하는 것은 육체적으로 건강하기 이전에 살아가는 행위가 건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링거를 꼽고 계신 할머니는, 제 어머니가 이곳에 올 때에는, 잘 걸어 다니시고, 항상 옷을 깨끗하고 단정하게 차려 입으시곤 했던, 깔끔한 할머니였는데, 어느 날 넘어지시곤 일어나지를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가 알코올성 치매로 공덕동 병원에 입원해 계실 때, 옆 침대에 할머니 한 분이 입원해 계셨는데, 골절상으로 인해 일어나지를 못해 침대에서 1년 이상을 보내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노인 분들은 넘어지면 골절될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조심, 조심 또 조심해야 합니다. 할머니, 예전의 깔끔하신 모습으로 되돌아가시길 저는 기도합니다.
어머니를 찾아온 이 해의 갖가지 병들: 이 해는 어머니에게 3가지의 질환이 발생했습니다
첫째, 귀가 안 들리는 현상이 재발한 것입니다. 이건 경험이 있어서, 별로 놀랄 일도 아니고 해서 남양읍에 있는 이비인후과에 가서 가볍게 치료를 했습니다. 제 집사람이 와서 저를 도와주었습니다
두 번째로, 이번에는 눈이 침침해서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낙 중의 하나가 TV를 보시는 것인데, 눈이 침침해서 안되겠다 싶어 안과를 찾아갔습니다. 백내장이라네요. 주위에서 노인들은 백내장 수술이 위험하다고 해서 만류를 했지만, 저는 과감하게 남양읍에 있는 한 안과에 어머니를 모시고 가서 수술을 하기로 했습니다.
수술하는 날, 제 둘째 동생이 와서 도와주었습니다. 이 안과의 간호사 한 명이 ‘아주-무척-굉장히’ 뚱뚱했는데, 그 간호사를 보더니 어머니께서 거리낌없이 하시는 말씀이 “엉간이도 뚱뚱하다.” 그러더니 이어서 “뚱뚱하지만 예쁘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목성이 커서 안과 안의 누구 귀에도 이 말이 다 들렸습니다. 제가 미안해서 안절부절했습니다. 그러면서 또 하시는 말씀인즉 “아프면 어쩌꼬….”
수술은 무사히 끝났고 보름 만에 안대가 풀렸습니다. 어머니는 흐릿하게 보인다고 짜증을 내시기에 안경을 맞추어드렸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가면서, 시력이 점점 회복되고, 사물이 뚜렷이 보이니까 어머니는 안경 쓰는 것을 잊어버린 듯 합니다.
세 번째는 어머니의 위장 질환입니다:
병원의 간호사와 도우미가 말을 하기를, 어머니께서 식사 후에 가끔 구토를 하신다는 것입니다. 노인네니까 위장 기능이 약해서 그럴 수도 있겠지 하고, 그다지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온천욕 간다고 갔다가 돌아오시면, 예전에는 하지 않던 구토를 어김없이 한다는 것입니다. 심상치 않다 싶어, 결국 남양읍의 큰 병원을 찾아갔습니다. 의사는 요식행위로 어머니의 가슴과 등뒤에 청진기를 대고 나서는 혈액검사, CT검사, 내시경 검사 등 검사할 수 있는 것을 모두 하라고 합니다. 저는 혈액검사와 CT검사만 하기로 했습니다. 내시경은 노인에게 힘들다고들 합니다.
혈액검사결과지를 보니 생화학검사 항목이 21가지, 혈액학검사 항목이 15가지, 혈액응고검사가 4가지 항목이었습니다. 모두 이상 없는 것으로 판정됩니다. 다음에는 CT검사인데, CT란 Computer Tomography의 약자로 컴퓨터 단층촬영을 말합니다. 뼈, 혈관 그리고 신체의 연부조직에 대한 영상이 X-선보다 20배나 자세하게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의사들이 선호한다고 하는데, 별 특이 소견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겁니다. 결국 담당의사는 위장기능개선제 처방을 저에게 줄 수 있을 뿐입니다.
처방 받은 약을 미소요양병원의 간호부장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요양병원에서도 이 정도의 처방, 아니 이보다 더 좋은 약을 쓸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구토는 2013년 내내 간헐적으로 계속되었습니다, 어머니의 온천욕을 위한 외출은, 2주 걸러 한 번 하던 것을 4주 1회로 제한하고, 저녁식사도 외식을 하지 않고 병원식으로 섭식을 시켰습니다.
여동생은 못내 서운했던지 “그래도 엄마랑 저녁 식사 한끼 하는 것이 사는 재민데, 저녁 식사는 하고 가도록 하자.”하기에, "함께 저녁 식사해서 엄마 기분이 좋아질지는 몰라도 그 다음날 며칠 동안 구토하는 것이 뭐 좋단 말인가!”하고 잘라버렸습니다. 어머니께서 “저녁 먹고 가자. 맛있는 것 사주라.”하고 말씀하실 때도 저는 모른 척 그냥 넘어가버렸습니다. 이렇게 해서 2013년이 지나갔습니다.
[2014년, 어머니의 위장기능개선을 위하여…...]
수년간의 노력 끝에 어머니는 요양병원에 잘 적응을 하게 되시고, 그리고 큰 병들도 잠잠해져서 저로서는 꽤 편안한 마음으로 지금까지 시간을 보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늘 마음 한켠으로는 위장의 구토 문제가 마음에 걸렸습니다. 이해 3월에 다시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을 찾게 됩니다. 이번에는 미소요양병원의 진료의료서를 가지고 갑니다. 동수원병원은 입원을 권유합니다. 무작정 입원을 할 수가 없습니다. 낫는다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새로운 병원에 적응하는 것이 어려울 뿐더러, 달리 간호를 봐줄 사람도 없기에, 요양병원에 모시고 최선을 다해 돌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저의 한약재 지식을 동원해서 물처럼 마실 수 있는 건강차를 만들어드리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금년 6월초에 서울 경동시장의 약령시장을 갔습니다. 제기동 전철역, 이곳은 여전히 노인 분들이 많습니다.
한방차 안내문이 유달리 저의 눈을 끌어 당깁니다. 지하층을 나왔습니다. 제가 이곳에 있던 대학을 다닐 때에 비해 경동시장도 많이 달라졌죠. 성동역이 건재해 있을 때, 경동시장 뒤편 2층집에서 둘째와 함께 자취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이곳 약령시장에 오면 주로 예전에 거래했던 단골 한약상으로 갑니다.
처음에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쑥, 계피와 감초를 구입해 와서 추출을 해 보았는데, 쑥은 아무래도 쓴맛 때문에 차로 마시기에는 부적합했습니다. 그래서 계피와 감초를 추출한 물에 꿀을 넣어서 미소요양병원을 갔습니다. 어머니는 TV 를 보고 계셨습니다.
어머니는 역시 남들하고 나눠먹기에 바쁩니다.
계피와 감초만으로는 태 부족한 감이 들어 2차 약재를 구입할 때는 진피, 백출, 구절초, 대추 등을 구입했습니다. 다른 약재보다 백출이 값이 꽤 비쌉니다. 백출은 다소 무겁고 쓴 맛이 있었습니다.저는 이들 약재들은 전기밥솥의 보온 온도에서 열수로 은근히 추출해 냅니다. 약재 하나하나를 추출 하면서 맛이 쓴지, 단지, 쏘는지를 감별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제 두 달째. 어머니의 구토 증세가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한방약차의 효험이 있어선지, 요양병원에서 잘 간호를 해주어선지, 아니면 외식을 삼가 해서 그런 것인지, 따져볼 수는 없으나 요즘은 구토를 하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그러면 됐습니다.
어머니는 가끔 요양병원 형편을 생각 합니다. 환자들이 자기 방에서 쉬거나 보이지 않을 때는, “병원에 사람이 없어서 우짜고?”하며 마치 자기 병원 걱정하듯 할 뿐아니라, 낮에 천정의 전등이 켜져 있으면 “저 봐라. 불을 저렇게 훤하게 켜놓고 있다. 전기세 많이 나가구로…....”하며 안타까워 하십니다.
모든 것을 귀하게 여기고 절약하며 살아왔던 그 시절의 생활습관이 몸과 마음에 박혀 있는 것입니다. 병원에서 제가 돌아나가면 어머니는 저를 눈으로 배웅을 하십니다. 그러면 저는 손을 흔들어주고는 떠납니다.
병원 뒤쪽에는 빈 공터가 있는데 칡으로 뒤덮여 있습니다.
여기가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위한 정원이었으면 하고 생각을 합니다. 물론 텃밭을 포함해서요. 귀찮다고 아프다고 침대에만 누워있으면 운동 부족으로, 근육은 줄어들고 뼈는 점점 약해집니다. 움직이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땀을 흘려야 합니다.
제 소망은 어머니랑 시골 텃밭 있는 농가에서 각종 채소며 과수를 키우고 닭, 오리, 토끼, 염소 그리고 꿀벌을 치면서 목가적인 삶을 보내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점점 쇠약해져 갑니다. 이제 시간은 얼마 남지를 않았습니다. 죽음의 신이 점점 가깝게 다가 오고 있습니다.
오늘은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한국을 방문한 날입니다. 부디 이 지구상에서 민족과 나라간에 평화가 찾아 들고, 어려움을 겪는 모든 이들에게 행복해지고, 제 가족과 제 자신에게도 평화가 깃들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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